아내의 명품 - 단편소설

나는 10년전 덧씌운 금니가 아팠다. 밤새 잠을 못잔 것은 아픈 이도 그러려니와 지난밤에 아내와 다툰 것이 맘에 걸려서이다. 싸움도 해본 놈이 잘하지 싸움을 싫어하는 나는 매번 아내에게 묵사발 나게 혼이나 나고 있다. 그것도 생각해보면 별것이 아닌데 아내의 비위를 적절히 맞추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영어과외를 하는 아내는 몸집은 크지만 처녀 때엔 남자들이 꽤 따라다녔을 만큼 미모가 있다. 오똑한 콧날에 뽀얀 피부가 살점이 많이 붙어 있어도 짐작게 하는 이목구비이다. 결국 다투다가 수입이 적게 들어온다는 악다구니를 듣다보니 욱하는 성질이 올라와서 욕을 한바가지 하고선 집을 나와 버렸다. 갈 곳도 없고 주머니도 비어 회사 앞 찜질방에서 지낸 터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다.

오늘 낮의 계약은 순조로웠다. 계약금 100만원을 받고는 아픈 이도 잊어버리고 낮에 친구를 불러 막걸리를 마셨다.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많이 시켰다. 물회와 옥돔구이, 막걸리 2통을 주문해서 4만원을 쓰고는 오랜 만의 계약이라 기분이 좋아 그것만 먹고도 취기가 올라왔다. 회사로 돌아와 원고를 만들고 편집을 넘기는데 아내가 백화점에 가자고 하며 지난밤의 일은 추궁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빨리 털어버릴 요령으로 두말없이 약속장소로 나갔다. 계약금 받은 걸로 가방이나 하나 사줘야겠다는 마음에 오랜만에 가장 노릇을 해보겠다며 스스로 어깨가 올라갔다.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아이 둘을 돌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아내는 명품매장만 돌고 있다. 최근에 친구들을 만나면 구찌니 샤넬이니 다 들고 있다며 본인도 하나 장만하려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번 돈으로 살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통 크게 웃는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고 자존심도 상해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명품관 입구에는 'VIP고객카드 발급안내-당일 70만원 이상 구매시 해당' 이라는 포스터가 큼지막하게 붙어서 여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저마다 명품이라는 가방을 하나씩 들고서는 이리저리 뽐내고 있다. 이러 저리 살펴보니 명품가방을 들었다고 모두 멋있지는 않다. 그녀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법에 걸렸으리라. 한심한 예편네들.

나는 아내가 고른 패션을 보기위해 매장으로 들어섰다. 촌티나게 안보이려고 비싼 옷 차려 입고 오라고 했나보다. 그래도 꼴에 디자인회사 다닌다고 감각은 있어서 어디가도 인물값은 하고 다닌다. 아내가 고르는 물건마다 색상이 안 맞느니 크기가 어울리지 않다니 요즘트렌드는 미니멀리즘 이니 하며 명품이라도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매장 안에서 조곤조곤 씹어 댄다. 결국은 아내가 좋아하는 걸로 정했다 얼핏 가격표를 보니 내가 매달 보내주는 생활비의 절반이다. 그럼에도 내색치 못한 건 아내가 계산을 하였고 싸움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리라.

고급스럽게 디자인된 쇼핑백을 들고서는 배고픈 아이들의 속을 달래기 위해 백화점 식당으로 갔다. 갑자기 아파오는 이빨 탓에 나는 국수를 시키고 아내와 아이들은 돈가스를 시켰다. 백화점 식당은 바깥 매장 보다 2-3천원 비싸고 맛은 후지다. 민감한 입속은 조미료 맛만 찾아낸다. 평소 소금도 잘 안 먹는 나는 입에 맞지 않다. 전날 아침에 아이들 밥상 차릴 때 만들어줬던 오뎅탕이 백번 났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팠는지 아이들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나는 피곤하기도 해서 집으로 가자고 보채었다. 아내는 잠시 고객센터에 들른다며 애들 잘보고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고급스런 문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기다리다 나온 아내는 VIP고객카드를 입에 물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자랑을 하는 행동일 것이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내가 내민 제휴쿠폰 북에는 죄다 명품매장 할인 쿠폰이고 제휴된 곳은 가 보지도 않을 특급호텔 40-60%할인권이다. 집으로 오는 길을 일부러 쉬운 길로 들어섰다. 아내에게 다음 방문 때에는 이쪽 길로 운전하면 금방 찾아온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다시 방문하지 않을 매장이니까.

하루만에 돌아온 집에는 빨래거리와 설거지 거리가 수북하다. 아내는 명품가방과 함께 최근에 구매한 명품 옷을 입으며 거울속에서 나오질 않는다. 8살 큰 녀석은 숙제 한다며 영어문장을 내이티브 발음으로 뱉고 있고 둘째 녀석은 영어 원작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한마디씩 내뱉는다. '유우 윈 캐러빈 렛미 어스'

철든 7살과 철없는 3살이 재롱을 떤다. 나에게는 이것이 명품인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둘째는 배가 고픈지 우유를 달라며 애교를 부린다. 냉장고에 보관된 우유를 데워서 장모님이 손수 갈아준 미숫가루를 타서 주었다. 제법 커서 한손으로 먹는다.

나는 세탁물을 분리해서 돌리고 흐트러진 방을 정리했다. 약을 먹어도 금니는 계속 아프고 왼쪽 가슴마저 저려왔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겨놓은 먹걸리를 벌컥벌컥 마시고 소파에 앉았다. 책꽃이에서 천페이지가 넘는 '괴테와의 대화'를 펼쳤다. 글은 허공에 떠다니고 심장은 터져나가는 듯하다. 창고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내보냈다.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소리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