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기님의 글---------------------------
선생님의 눈물
"여보세요? 손동기 선생님이요?......"
2년전, 스승을 찾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평생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 연락처를 알고자 부산시 교육청에 전화를 했더니 정년퇴임하신 분의 연락처는 잘 모른단다. 정년퇴임을 하신 학교에서는 알지모르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기억을 더듬어 정년퇴임하신 학교를 생각해 내어서 연락을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몇 년 전에 작고하셨단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이셨다. 머리가 땅에 닿지만 않을 정도로 왜소하고 어법도 딱딱한 독일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어법이 독일어처럼 딱딱해도 마치 동토를 비집고 나오는 여린 새 싹처럼 오히려 그 딱딱함 속에 진정 제자를 아끼는 강인한 마음이 담겨있음을 잘 알았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선생님께 듬뿍 사랑을 느꼈던 제자였다.
10여년전이었을 것이다.
"형님, 손 선생님께서 정년퇴임하신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가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은 그 분을 축하해드려야지."
D대학교 한의대 교수로 있던 후배의 말을 듣고 대답은 하면서도,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의해 밀려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그 분의 노후가 걱정이 되었다. 유난히 마음이 여리신 그 분을 난 존경만 했지 선생님의 정년과 살아오신 세월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나다니...,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이렇게 다른가 하면서 한참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정년 퇴임식은 그야말로 성대했다. 선생님을 뵈러온 수많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지르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에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분들 중의 한분으로 우리 국어선생님이었던 김 선생님도 계셨다. 어떤 선생님이 "젊은 놈들은 하나도 없고, 무슨 늙은 제자들만 이래 많이 왔노?" 하셨다. 휴가를 내고 다섯 시간 길을 선생님 생각으로 단숨에 달려온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는, 간단히 마련된 피로연과는 달리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이 넘치는 그야말로 화려한 잔치마당이었다.
"김 선생님께서도 좋으시죠?"
"그래, 너무 좋다. 부럽다."
"느거 내 퇴임식에도 꼭 와야지? 나도 2년 정도 남았다."
부러움에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은 김 선생님께서는 힘주어 다짐을 받으려 하신다. 하지만 김 선생님의 말씀은 이내 축하의 분위기에 묻혀버렸다. 또 한 분의 은사이신 김 선생님께는 죄송스럽기도 하였지만,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은 우리들이었다. 생활에 찌들려 미처 받들지 못한 부모님께 불효의 죄를 씻으려는 자식들처럼,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 다 못 드린 마음의 정을 오늘만큼이라도 아낌없이 드리려는 듯 오직 한 분 선생님만 바라보는 제자들이었다.
우리들의 감동어린 눈길과,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늙다리 제자들의 참석에 마냥 흐뭇해 하시는 선생님의 눈길속에서, 피로연이 진행되던 교실에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거름삼아 정담의 꽃이 피어났다. 누군가가 노래를 한다. 보리수다.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더니 이내 합창이 되었다.
"암 부룬넨 포어 뎀 토레"
독일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가 아는 보리수의 가사다. 독일어 시간에 부르시던 선생님의 군가 같은 -슈벨트가 귀 달린 것이 후회되어 벌떡 일어날 정도로 딱딱한- 노래는 음정만 겨우 맞는 수준이었지만 우리는 어느 예술 가곡보다 더 사랑했었다. 그 노래가 선생님의 화신인 것처럼 되살아났다. 왜 우리가 그 분을 그렇게 사랑했는지 이유를 대라면 누구도 자신 있게 이유를 댈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졸업 후, 우리들이 고교 시절을 얘기할 때면 단연 사랑하는 선생님의 1호는 그 분이었다. 그 것을 마치 선생님께 확인이라도 시켜드리려는 듯 학창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불렀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 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이 순간, 선생님은 우리들 마음의 보리수였고, 우리는 그 그늘 아래로 찾아온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제도가 있었는데, 독일어는 대입시험과 무관한 과목이었다. 독일어 진도가 수동태, 능동태 과정이었던 어느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시는데, 어떤 학생들은 책상 서랍에 다른 과목의 책을 넣고 공부를 하였고, 또 어떤 학생들은 아예 보란 듯이 책상에 또 다른 과목의 책을 펼쳐 놓기도 하였다. 묵묵히 수업을 진행하시던 선생님은 천정을 잠시 응시하시다가 고개를 살며시 숙이시고는 가만히 책을 덮고 나가시는 것이다. 선생님의 적셔진 눈시울을 놓치지 않고 따라 나선 나는 화장실로 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금새라도 쓰러질 듯이 무거운 걸음을 걷는 그 분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선생님은 수도꼭지를 틀고, 가슴에서 흐르는 서글픈 마음을 닦아내려는 듯 자꾸 얼굴을 훔치셨다.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선생님... 들어가시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뭐 하러 왔니?" 하신다.
"......"
"너희들이 불쌍해서 내가 눈물이 난다."
"독일어 수업을 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삶의 태도가 걱정이 되어서 내가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
평소 말투는 딱딱하셔도 다정다감한 선생님이셨다. 웃는 눈빛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던 선생님이셨다. 젊은 선생님이 많이 계시던 내 고향 학교의 40대 후반 선생님이셨지만 연장자 순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선생님, 그러면서도 언제나 천진한 아이처럼 우리를 바라보시던 선생님이셨다. 어떤 선생님보다도 아버지 같았고 큰 형님 같았던 선생님이셨다. 그런 선생님이 수도꼭지로 흘러나오는 물로 마음을 닦아내고 계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과목을 홀대하였으나, 선생님의 눈물은, 선택과목에서도 잘 선택하지 않던 독일어 선생님의 회한에 찬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제자들이 올바른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의 눈물이었다.
아! 그렇다. 선생님은 내 생각과는 달리, 독일어 선생님으로서의 서글픔이 아니라, 눈앞의 시험만 생각하고 배울 것을 배우지 않는 우리의 모습에서 달콤한 것만 쫓아가는 미래의 우리가 걱정되신 것이다. 왜 독일어 선생님으로서의 회한이 없었으랴만 선생님은 그 순간에도 어린 나에게 삶에 대한 암시를 주신 것이다.
"선생님..."
이날의 기억은 화선지에 번진 먹빛(發墨)처럼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닮고 싶었다. 그런 선생님이었기에, 스승의 날, 그 것도 선생님이 작고하신지 예닐곱 해가 지나고서야 겨우 수소문을 한 후,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한 나의 가슴에는 한없이 눈물만 쌓여 갔다. 나는 눈시울만 겨우 적신 채, 그 옛날의 선생님처럼 하늘을 쳐다보다가 이내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속에 흐르는 선율을 따라 비에 젖은 창문처럼 눈자위가 흐려진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먼 훗날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의 눈물을 말씀드리면서, 내 삶에 미친 선생님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때때로 손꼽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게 수포로 돌아가다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나의 가슴에는 사랑의 열병를 앓는 사람이 미처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아픔에 겨워하듯이, 회한이 복바쳐 올랐다.
"너희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너희들의 삶의 태도가 걱정이 되어서 내가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
끊임없이 귓전을 울리고 가슴을 치는 우리 선생님의 말씀,
선생님은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는 영원히 선생님으로 살아 계실 겁니다.
"선, 생, 님!"
강원장 당신도 교단에서 그것도 생명을다루는 인술을전공하는 제자들을가르쳤으니 그마음오죽하겠오 흐르는세월을 어찌하겠오 스승님의 명복이나빌어드립시다. 그리고 더 늣기전에 친구들얼굴이나보고 살아갑시다. |
|
[RE]선생님의 눈물 
28,559 
16
